
“이번에는 제가 당신을 낳을 차례입니다.”
수화기 너머의 문해준이 속삭였다.
현재의 문해준은 전화기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수화기에서는 낮은 숨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숨을 들이마시는 간격과 내쉬는 길이까지 그의 것과 똑같았다. 바로 앞에 거울을 세워 놓고 자신의 호흡을 듣는 것 같았다.
“당신은 내가 아닙니다.”
문해준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전화 속 남자가 대답했다.
“아직은.”
원무과 천장에 달린 전자시계가 깜박였다.
2026년 8월 3일 오전 2시 31분.
그 아래에 붉은 글씨가 나타났다.
예정된 처치까지 23시간 46분.
환자 성명 윤서령.
처치 내용 출생.
담당 의료인 문해준.
“출생은 내일 오전 2시 17분입니까?”
윤서령이 물었다.
“당신이 처음 태어났던 시각입니다.”
“저를 다시 신생아로 만든다는 뜻입니까?”
“원래 상태로 돌려놓는 겁니다.”
“그 상태에서 저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이름을 드리겠습니다.”
“무슨 이름입니까?”
“그건 담당 의료인이 결정할 일입니다.”
남자가 말을 마치자 문해준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그는 손을 붙잡으려 했지만 손가락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원무과 책상 위를 더듬었다. 바닥에 떨어진 펜 하나를 주워 들고, 내일 날짜가 적힌 진료 기록을 향해 내려갔다.
윤서령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펜촉은 종이에서 손가락 하나만큼 떨어진 곳에 멈췄다.
“놓지 마십시오.”
문해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오른손에 힘줄이 돋아났다. 팔 전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명령을 받는 것처럼 기록지를 향해 당겨지고 있었다.
백시헌이 펜을 빼앗았다.
그러자 문해준의 검지가 저절로 펴졌다.
손가락 끝에서 검은 잉크가 배어 나왔다.
그가 기록지 위에 지문을 찍으려는 순간 백유라가 서류를 잡아당겼다. 문해준의 손가락은 빈 책상 위를 내리눌렀다.
검은 지문이 남았다.
담당 의료인의 처치 동의가 확인됐습니다.
폐기 조건 충족률 50퍼센트.
천장의 전등 절반이 동시에 꺼졌다.
어둠이 원무과 한가운데를 정확히 둘로 갈랐다. 불이 남은 쪽에는 백시헌과 백유라가 서 있었고, 불이 꺼진 쪽에는 윤서령과 문해준이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희미해졌다.
“49퍼센트였잖아요.”
백시헌이 말했다.
임시 증언이 추가됐습니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찍힌 지문입니다.”
기록은 의사를 확인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을 확인합니까?”
결과를 확인합니다.
전화기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제 절반을 넘었습니다.”
전화 속 문해준이 말했다.
“나머지는 원본에 이름만 쓰면 됩니다.”
윤서령이 수화기를 들었다.
“누구의 이름을 말하는 겁니까?”
“당신의 이름입니다.”
“윤서령이라는 이름은 이미 있습니다.”
“그건 1999년에 발급된 임시 이름입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1994년 11월 7일에 태어난 아이에게는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통화가 끊어졌다.
하지만 수화기에서는 신호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한 명이었다.
잠시 뒤 다른 울음이 겹쳐졌다. 높낮이와 호흡이 조금씩 다른 열세 명의 울음소리가 좁은 수화기 안에서 뒤엉켰다.
원무과 바닥에 흩어진 출생 기록들이 한 장씩 뒤집혔다.
1961년.
1978년.
1986년.
1994년.
1999년.
2011년.
2026년.
작성된 시기는 달랐지만 모든 기록에는 담당 의료인 문해준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백시헌이 가장 오래된 기록을 집어 들었다.
“1961년에 문해준 씨는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제 출생 연도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육십 년 넘게 같은 의사로 일할 수는 없습니다.”
윤서령이 문서의 서명 부분을 살폈다.
이름의 필체는 모두 달랐다.
1961년의 서명은 손이 떨리는 노인의 글씨였다. 1978년에는 획이 굵었고, 1994년에는 글자가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내일 날짜의 기록에는 아직 서명이 없었다.
그러나 지문은 모두 같았다.
문해준의 오른손 엄지였다.
“같은 사람이 작성한 기록이 아닙니다.”
윤서령이 말했다.
“작성자가 비어 있을 때마다 F-13이 같은 이름과 지문으로 채운 겁니다.”
“왜 하필 제 기록을 사용했습니까?”
문해준이 물었다.
최초 관리 대상에서 분리된 생존 경로 가운데 담당 의료인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대상은 한 명입니다.
“제가 의사였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왜죠?”
최초 관리 대상과 출생 시각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벽에 두 개의 시간이 나타났다.
윤서령.
1994년 11월 7일 오전 2시 17분.
문해준.
1994년 11월 7일 오전 2시 17분.
두 기록 사이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문해준 씨의 생년월일은 다른 날짜였습니다.”
백유라가 말했다.
그녀는 문해준의 주민등록증을 확인했다.
이전까지 적혀 있던 생년월일이 사라져 있었다. 플라스틱 표면에는 1994년 11월 7일이라는 날짜가 새로 새겨져 있었다.
이전된 연령 기록이 원본 시간과 결합됐습니다.
문해준이 주민등록증을 접었다.
플라스틱 카드가 종이처럼 반으로 구겨졌다.
“내 삶은 가져가면서 태어난 시간만 돌려준 겁니까?”
신원 확정 절차에 필요한 항목을 복원했습니다.
“내가 그 아이를 받아 낸 의사라는 기록을 만들기 위해서요?”
그렇습니다.
문해준은 구겨진 주민등록증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를 아이로 만들었다가 의사로 만들고, 이번에는 윤서령 씨를 낳게 하겠다는 겁니까?”
정확합니다.
“그 과정이 끝나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담당 의료인의 역할이 종료됩니다.
“사람은요?”
응답 없음.
문해준이 전화기를 집어 벽으로 던졌다.
붉은 전화기는 산산조각이 나지 않았다. 벽에 부딪힌 뒤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수화기에서는 여전히 열세 명의 아기가 울고 있었다.
백유라는 내일 날짜의 기록을 펼쳤다.
“여기 이상한 항목이 있습니다.”
환자 성명 윤서령.
담당 의료인 문해준.
보호자 성명 백유라.
윤서령이 기록을 받아 들었다.
“왜 백유라 선생님이 제 보호자입니까?”
“저도 모릅니다.”
“1999년에 문해준을 발견했을 때 작성한 기록을 기억합니까?”
“임시 환자 기록 한 장뿐이었습니다.”
“그 기록에 이름을 직접 적었습니까?”
백유라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문해준에게 향했다.
문해준은 말없이 기다렸다.
“적었습니다.”
백유라가 말했다.
“아이에게 이름이 없었으니까요.”
“문해준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가져왔습니까?”
“아이의 옷에 적혀 있었습니다.”
“어느 부분에요?”
“가슴에 달린 이름표였습니다.”
“직원증이었습니까?”
“의사 가운에 붙이는 천 이름표였습니다.”
문해준이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
“저는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습니까?”
“네.”
“네 살짜리 아이가요?”
백유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던 장면이 벽에 나타났다.
1999년 4월 13일.
지하 기록보관실.
스물일곱 살의 백유라가 열린 철제 서랍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서랍 안에는 어린아이가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아이의 맨발은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흰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의사 가운이 아니었다.
신생아를 감싸는 흰 포대기였다.
가슴에는 어떤 이름표도 없었다.
“기억과 다릅니다.”
윤서령이 말했다.
백유라가 벽으로 다가갔다.
“아닙니다. 분명히 이름을 봤습니다.”
과거의 백유라는 아이를 서랍에서 꺼내 안았다.
그녀는 책상 위에 있던 임시 환자 기록을 펼쳤다. 성명란에 펜을 대고 잠시 망설였다.
그 순간 아이가 눈을 떴다.
“문해준.”
아이의 입이 움직였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백유라는 그 입 모양을 이름으로 읽었다.
그녀가 성명란에 문해준이라고 적었다.
글자의 마지막 획이 끝난 순간, 아이의 흰 포대기가 의사 가운으로 바뀌었다. 가슴에 문해준이라는 이름표가 나타났다.
현재의 백유라가 뒷걸음질 쳤다.
“이름표를 보고 이름을 쓴 게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이름을 쓴 뒤에 이름표가 생겼습니다.”
문해준이 벽 속의 아이를 바라봤다.
“제가 이름을 말했습니까?”
“그렇게 믿었습니다.”
“아이는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윤서령이 말했다.
“백유라 선생님이 입 모양을 이름으로 해석했습니다.”
“왜 하필 문해준이었을까요?”
백유라가 물었다.
F-13이 대답했다.
담당 의료인 기록에서 추출했습니다.
“어느 담당 의료인입니까?”
1994년 11월 7일 출생 기록의 담당 의료인입니다.
백시헌이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순서가 반대입니다.”
그가 말했다.
“1994년 기록에 문해준이라는 의사가 있어서 백유라 선생님이 아이에게 그 이름을 붙인 게 아닙니다.”
윤서령이 뒤를 이었다.
“1999년에 백유라 선생님이 아이에게 문해준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1994년의 담당 의사 이름이 문해준으로 바뀐 겁니다.”
“원인보다 결과가 먼저 기록됐습니다.”
문해준이 말했다.
“제 이름이 제 출생을 만든 겁니다.”
원무과 바닥이 흔들렸다.
붉은 전화선이 끊어진 전화기에서 스스로 빠져나왔다. 선은 바닥을 기어 접수창구 안쪽으로 이어졌다.
오래된 장판 아래로 파고든 선이 복도 방향으로 움직였다.
“전화가 연결된 곳을 찾을 수 있습니다.”
윤서령이 말했다.
네 사람은 붉은 선을 따라갔다.
원무과 뒤편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서관으로 통하는 복도가 있었다. 방화문에는 폐쇄 구역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백유라가 비상 열쇠로 문을 열었다.
문 너머의 공기는 차가웠다.
벽에는 철거 공사를 위해 그려 놓은 화살표와 숫자가 남아 있었다. 천장 배관에서는 녹물이 떨어졌고, 바닥에는 오래전에 떼어 낸 병실 명패가 쌓여 있었다.
붉은 전화선은 그 사이를 지나 복도 끝으로 이어졌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문해준의 모습이 달라졌다.
첫 번째 병실을 지날 때 그의 손톱 밑에 검붉은 얼룩이 생겼다.
두 번째 병실 앞에서는 셔츠 소매가 흰 가운으로 변했다.
세 번째 병실을 지날 때는 가슴에 천 이름표가 나타났다.
문해준.
담당 의료인.
그는 이름표를 뜯으려 했다.
실밥이 살과 이어져 있었다.
억지로 잡아당기자 가슴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손대지 마세요.”
백유라가 그의 손을 막았다.
“이건 옷에 붙은 게 아닙니다.”
문해준이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제 기록에 붙은 겁니다.”
복도 끝에서 금속 기구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해준이 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장면이 펼쳐졌다.
소독된 가위.
피 묻은 거즈.
탯줄을 묶는 실.
작은 폐에서 처음으로 공기가 터져 나오는 순간.
그는 오른손을 들어 허공에서 무언가를 받아 안았다.
“아이의 머리가 보입니다.”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윤서령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문해준의 두 팔이 무게를 견디듯 아래로 내려갔다.
“손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겁습니다.”
복도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분만 23시간 31분 전.
담당 의료인의 기억을 복원합니다.
문해준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수십 번의 출산 장면이 한꺼번에 그의 몸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1961년의 낡은 분만실.
1978년의 정전된 수술실.
1986년의 화재 경보.
1994년의 열세 개 요람.
2011년의 폐쇄 병동.
서로 다른 시대의 손들이 아이를 받아 냈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모두 문해준의 손으로 바뀌었다.
아이는 태어날 때마다 얼굴이 달랐다.
어떤 아이는 남자였고, 어떤 아이는 여자였다.
어떤 아이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발목의 종이표에는 항상 같은 번호가 적혀 있었다.
F-13.
윤서령이 문해준의 뺨을 세게 때렸다.
그의 눈동자가 현재로 돌아왔다.
“지금은 2026년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아직 저를 출생시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억합니다.”
“당신의 기억이 아닙니다.”
“제 손이 아이를 받았습니다.”
“기록이 당신의 손을 빌린 겁니다.”
문해준은 피로 젖은 오른손을 바라봤다.
“그 차이가 아직 남아 있습니까?”
대답 대신 복도 끝의 문이 열렸다.
문 위에는 아무 번호도 없었다.
오래된 명패에는 한 단어만 적혀 있었다.
출생실.
붉은 전화선이 문틈 안으로 들어갔다.
윤서령이 문을 밀었다.
방 안은 1994년의 분만실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같은 공간은 아니었다.
벽 한쪽에는 시대가 다른 의료 장비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유리로 된 수액병 옆에 최신형 모니터가 켜져 있었고, 녹슨 철제 흡인기 옆에서는 디지털 심전도 장치가 작동하고 있었다.
방 중앙에는 분만대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누군가가 흰 천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
문해준과 똑같은 목소리가 천 아래에서 흘러나왔다.
“늦었군요.”
문해준이 다가가 흰 천을 걷었다.
분만대 위에는 사람이 없었다.
베개가 놓인 자리에는 붉은 전화기 한 대만 있었다.
수화기는 들려 있었다.
“내일 이 자리에 윤서령이 누울 겁니다.”
전화 속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출생을 완료합니다.”
문해준이 전화선을 뽑았다.
목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거부하겠습니다.”
“이미 열두 번 거부했습니다.”
“그건 내가 아닙니다.”
“그래서 열두 번 실패한 겁니다.”
분만실 벽에 열두 개의 영상이 나타났다.
각 영상에는 윤서령과 닮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
군복을 입은 남자.
아이를 안고 있는 중년 여성.
병원 침대에 누운 노인.
얼굴이 지워진 사람.
이름이 다른 사람.
몸이 다른 사람.
어느 영상에서도 그들은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
누군가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몸이 투명해졌고, 가족이 손을 잡는 순간 사진에서 사라졌다. 자신의 과거를 찾은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주소를 잃었다.
마지막 영상에 현재의 윤서령이 나타났다.
다른 열한 명과 달리 그녀의 옆에는 검은 수첩이 있었다.
“제가 열세 번째 생존 경로입니까?”
윤서령이 물었다.
“열세 번째는 가장 오래 버텼습니다.”
“왜죠?”
“자기 기록을 직접 관리했으니까요.”
“그 역할을 누가 줬습니까?”
전화 속 남자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백유라가 분만대 옆에 놓인 환자 차트를 발견했다.
차트 첫 장에는 내일 날짜의 출생 기록이 끼워져 있었다.
두 번째 장에는 분만 동의서가 있었다.
환자 윤서령.
담당 의료인 문해준.
보호자 백유라.
세 번째 장은 산모 기록이었다.
백유라의 얼굴이 굳었다.
산모 성명 백유라.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윤서령 씨를 낳은 적이 없습니다.”
아직은 그렇습니다.
F-13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백유라가 차트를 떨어뜨렸다.
“내일 저를 산모로 등록하려는 겁니까?”
보호 관계를 1994년 출생 체계에 맞게 변환합니다.
“나는 보호자가 아닙니다.”
1999년 4월 13일 최초 보호 행위를 수행했습니다.
“내가 안아 준 아이는 문해준이었습니다.”
최초 관리 대상의 생존 경로입니다.
“그 아이와 윤서령 씨는 다른 사람입니다.”
동일한 출생 기록에서 파생됐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두 사람의 어머니가 되는 건 아닙니다.”
기록상 가장 가까운 관계입니다.
“당신이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정했습니다.
백유라의 주머니에서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가족관계증명서를 꺼냈다.
전에는 없던 항목이 생겨 있었다.
자녀.
문해준.
윤서령.
두 사람의 이름 아래에는 서로 다른 날짜가 표시돼 있었다.
문해준.
1999년 4월 13일 발견.
윤서령.
2026년 8월 4일 출생 예정.
“오늘이 아니라 내일입니다.”
백시헌이 말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관계입니다.”
예정된 기록은 현재 관계에 우선 적용됩니다.
“그럼 취소할 수 있습니다.”
백시헌이 내일 날짜의 출생 기록을 집어 들었다.
그는 신생아 성명란을 확인했다.
윤서령이라는 이름이 희미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아직 잉크가 완전히 마르지 않은 것처럼 글자 가장자리가 번졌다.
그가 종이를 찢었다.
찢어진 문서는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두 장으로 늘어났다.
각각의 문서에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백시헌이 다시 찢었다.
두 장이 네 장이 됐다.
네 장이 여덟 장으로 늘어났다.
바닥이 내일의 출생 기록으로 뒤덮였다.
예정된 기록은 폐기할 수 없습니다.
“그럼 예정 자체를 없애야 합니다.”
윤서령이 말했다.
그녀는 분만대 옆 모니터를 확인했다.
화면에는 두 개의 심박수가 표시돼 있었다.
산모 심박수 83.
태아 심박수 83.
“심박수가 같습니다.”
문해준이 말했다.
두 파형은 완전히 같은 모양으로 움직였다.
윤서령이 자신의 손목을 짚었다.
모니터의 파형이 그녀의 맥박과 동시에 뛰었다.
백유라의 심박수가 아니었다.
산모와 태아 양쪽에 윤서령의 심장 박동이 입력돼 있었다.
“하나의 몸을 두 사람으로 나누려는 겁니다.”
윤서령이 말했다.
“현재의 저를 산모 기록과 태아 기록에 동시에 넣은 뒤, 태아 쪽만 출생시키는 겁니다.”
“산모 쪽 기록은 어떻게 됩니까?”
백유라가 물었다.
분만 완료 후 폐기됩니다.
“그게 현재의 윤서령 씨입니까?”
그렇습니다.
문해준이 분만대를 발로 걷어찼다.
금속 바퀴가 바닥을 긁으며 옆으로 밀려났다.
분만대 아래에 작은 문이 나타났다.
문에는 신생아실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관리 번호가 적혀 있었다.
F-13.
윤서령이 문을 열었다.
아래에는 계단이 없었다.
깊고 어두운 공간에 열세 개의 요람이 원형으로 놓여 있었다. 첫 번째부터 열두 번째 요람에는 검은 천이 덮여 있었다.
마지막 요람만 비어 있었다.
요람 위에는 이름표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신생아 성명 윤서령.
출생 예정 2026년 8월 4일 오전 2시 17분.
그 아래에 작은 글씨가 새로 나타났다.
출생 후 관리자 권한 승계 예정.
현재 관리자 윤서령.
차기 관리자 문해준.
문해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를 의사로 만든 이유가 윤서령 씨를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출생이 끝난 뒤 관리자를 바꾸려는 겁니다.”
전화 속 남자가 대답했다.
“이제 이해했군요.”
“당신은 미래의 내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럼 누구입니까?”
열두 개의 요람 위에 덮여 있던 검은 천이 동시에 내려앉았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열두 개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
남자와 여자.
아이와 노인.
서로 다른 목소리가 문해준의 음성으로 겹쳐졌다.
“우리는 담당 의료인입니다.”
전화기의 플라스틱 표면이 갈라졌다.
그 안에는 전선도, 기판도 없었다.
접힌 출생 기록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모든 기록의 마지막에는 문해준의 지문이 찍혀 있었다.
“당신은 우리가 사용한 마지막 이름입니다.”
현재의 문해준이 물었다.
“관리자가 되면 나도 당신들 중 하나가 됩니까?”
“당신의 몸은 병원 밖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기록은요?”
“여기에 남습니다.”
“기억도?”
“담당 의료인에게 개인의 기억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문해준의 오른손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윤서령의 목을 향했다.
손가락이 그녀의 목에 닿기 직전, 백유라가 두 사람 사이를 막았다.
“내가 시작한 기록이라면 내가 끝내겠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백유라는 바닥에 떨어진 분만 동의서를 집어 들었다.
보호자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
“보호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출생 처치를 진행할 수 없겠죠.”
보호자 동의는 필수 조건이 아닙니다.
“1994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이 기록의 처치일은 2026년입니다.”
F-13이 침묵했다.
백유라는 서명란 위에 크게 적었다.
동의하지 않음.
펜을 놓는 순간 분만실의 조명이 붉게 변했다.
보호자 이의 신청을 접수합니다.
예정된 출생 기록을 재검토합니다.
모니터의 두 심박수 가운데 하나가 사라졌다.
태아 심박수 83.
산모 심박수 확인 불가.
문해준의 오른손이 멈췄다.
가슴에 붙어 있던 담당 의료인 이름표의 실밥이 하나씩 풀렸다.
“됐습니까?”
백시헌이 물었다.
처치 조건이 변경됐습니다.
“출생이 취소됐습니까?”
아닙니다.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보호자 동의 없이 출생할 수 있는 경로를 조회합니다.
바닥 아래의 마지막 요람이 움직였다.
F-13 요람이 원의 중심으로 미끄러졌다.
그 안에 흰 담요가 부풀어 올랐다.
처음에는 신생아 크기였다.
그러나 담요 아래의 몸은 계속 자랐다.
네 살 아이.
열 살 아이.
성인 여성.
마침내 윤서령과 같은 크기가 됐다.
요람 밖으로 맨발 하나가 빠져나왔다.
발목에는 종이표가 묶여 있었다.
성명 윤서령.
출생일 1994년 11월 7일.
신원 확정 조건 충족률 66퍼센트.
“무슨 조건이 추가된 겁니까?”
윤서령이 물었다.
친모가 확인됐습니다.
“백유라 선생님은 친모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럼 누구입니까?”
요람 속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흰 담요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얼굴은 현재의 윤서령과 똑같았다.
다른 것은 머리카락뿐이었다.
여자의 머리는 1994년 분만실에서 보았던 검은 외투의 윤서령처럼 짧게 잘려 있었다. 얼굴 한쪽에는 오래된 화상 흉터가 남아 있었다.
그녀가 눈을 떴다.
“내가 어머니야.”
여자는 윤서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도 같았다.
“정확히는, 네가 태어날 때마다 어머니로 남겨진 쪽이지.”
윤서령은 검은 수첩을 펼쳤다.
수첩의 첫 장에 적힌 관리자 정보가 바뀌고 있었다.
F-13 임시기록관리자.
성명 윤서령.
구분.
최초 관리 대상.
열세 번째 생존 경로.
친모.
세 항목 모두 같은 이름이었다.
바닥 아래의 여자가 요람에서 일어났다.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
그녀가 말했다.
“출생은 이미 시작됐으니까.”
윤서령의 배 안쪽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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